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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노무현의 주소지 없는 편지

http://news.nate.com/view/20091008n00698

노무현 대통령의 미완성, 아니 완성은 되었으나 보내지 못했던 편지가 공개되었다. 편지란 소통의 도구이다. 작성한 이의 마음이 우체국과 우체부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되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낭만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그는 부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 편지들을 뒤로 남기고 피안의 세계로 갔다. 그의 죽음을 계속 왈가불가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부치지 못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외침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연차 수사가 웃기지도 않게 흐르고 있다. 애초에 참여정권의 가장 큰 스캔들로 비화시키려던 그들의 목표는 흐지부지 되었다. 어쩌면 노무현이 죽음 마당에 더 이상 이런 수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참하게 매장될 뻔했으나 참혹하게 싸우다가 극적으로 사라진 한 영웅에게 그들은 이제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한 시대는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현대의 이론적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큰 테마는 실제에 대한 문제이다. 라깡으로 대표되는 이론가들은 우리의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체계의 근원에는 실제계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언어학적 전환 이후로 모든 것을 언어와 기호로 파악하려 하던 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큰 공격은 사실 실제계에 대한 주장에서 나왔다. 실제는 사물로, 욕망하는 몸으로, 감추어진 죽음으로 존재하며, 드러나는 순간 감추어져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바로 진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원래 나타나자 마자 감추어질 운명에 처해 있다. 진리를 본 인간은 외디푸스처럼 눈이 멀게 된다. 진리는 그만큼 무섭고 기괴하고 (uncanny) 치명적이다. 포우의 잃어버린 편지에 대한 분석에서 라깡은 뒤팽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누구도 보지 못한 사물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의 욕망의 실제를 논한다. 미디어에서 연일 쏟아지는 죽음의 이미지는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실제로 죽어서 썩어가는 육체들이 있다. 이라크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다.

노무현의 시체를 본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시체는 실제를 담고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잔재물들 (정신분석적으로 흔적, 혹은 오브제 아라고 불리는)은 남아 있다. 그 잔재물들은 이념의 덮개를 쓰고 우리의 근간에서 실제와 진리의 존재를 말해준다. 노무현의 편지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의 육체라는 실제의 흔적이고 부분이다.

이명박 정권은 그 편지를 절대로 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그의 이 정권에서의 운명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노무현이나 김대중은 육체 조차도 용인될 수 없는 실제들이었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이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어떤 가치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의 담론들 속에서 이 둘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살해라고 하지 않겠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정권을 탄생하게 한 우리들의 집단 살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예정된 어떤 역설적 운명이었다.

편지들은 수신자가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 편지들, 즉 노무현의 파편들은 그가 목적으로 한 곳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장과 국장을 통해 지지율이 40퍼센트에 이르렀다는 이 정권안에서, 그리고 그 정권을 떠받들고 있는 세력들 속에서 그들의 편지는 부치지 못한 편지로 영원히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 편지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꿈과 그들의 이상은 번개라고 표현한 김대중의 촛불 민중들 속에서, 그를 탄핵과 죽음과 재생으로 이끄는 이들의 고요한 실천들 속에서 살아있다. 육체와 뜻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속의 진리와 글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이다.

by 다이몬 | 2009/10/08 05:06 | 트랙백 | 덧글(0)

사랑하라, 사유하라, 일하듯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핵심은 사유하고 회의하는 인간이다. 그 코기토를 회색빛 뇌피질의 세계로 규명한 것이 현대 과학이고, 그 코기토의 근원을 성기로 보게 한 것이 프로이트의 혁명이었다. 사유보다 행동을 설파한 이가 맋스였고, 사유의 정신사적 전망을 제시하려 한 것이 헤겔이었다. 니체는 인간을 넘어가야 할 다리라고 보았다. 이 모든 근대의 아버지들은 죽음보다 무시무시한 시대를 예시했고, 2차대전은 그러한 물질과 정신의 극단적 파괴를 증명해 냈다. 적어도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이후의 철학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를 관통하는 또하나의 조류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적어도 프랑스혁명의 줄기를 따라 생성된 68혁명과 그 시대의 시대적 조류는 (히피즘이나 정신분석학) 우리에게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사랑이 가진 의미를 되세기게 만들었다. 메를로-뽕띠의 말대로 우리의 육체는 보이는 것들의 세계속에 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사유를 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지니게 되었다. 사랑은 사유와 감각의 중간 지점에 있다. 사랑은 육체에서 파동을 일으키고 정신에서 개념으로 구체화 된다.

낭만주의와 근대의 시인들은 모두 사랑을 개별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시인들은 사랑의 무게를 이야기 한다. 나의 너에 대한 사랑은 사실 나와 너의 사건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혁명의 작은 뿌리들이고 형성해갈 이야기들의 한 실타래이다. 한 개인의 사랑이 인륜의 시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한 개인의 사랑이 얼마나 사회적이며 역사적이며 문화적인가를 이제 우리는 이야기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설파하듯 에로스와 아나케 (필연성)는 상충되면서도 같이 가게 된다. 인간의 사랑은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 일하고 생활하고 활동하는 인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낭만적 사랑은 사실 도시 속의 한 행위들일 수 있으며, 우리에게 사랑은 일과 여가의 과정중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랑은 순수하게 육체적인 휴식과 일의 세계에 속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정은 늘 사유하는 자신과 감각하는 자신과 일하는 자신 속에서 형성되고 이루어진다. 섹스 앤 시티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주인공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일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후기 근대가 낳은 인류학적 지평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나케와 에로스 중간의 사랑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일하고 사유하고 휴식핟록 되어 있다. 우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기계이며, 기계는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한다. 일하는 육체와 사랑은 떨어질 수 없다. 근대 이후의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은 여가와 예술적 재생산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적어도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사랑하라. 창조하듯이.

by 다이몬 | 2009/10/04 20:55 | 트랙백 | 덧글(0)

사랑이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 인류를 사랑하는 것 만큼의 가치를 지닙니다. 한 사람을 care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존재를 비추는 행위입니다.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그 관심의 세계에 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 세계가 나와 그 사람의 소통을 가능케 할 거라는 것을 예시하는 행위입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사랑은 존재의 다리입니다. 바쁘게 헤매이듯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엿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헤매입니다. 그 곳에는 진작 보았지만 알지 못하던 것들과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보이는 것들, 늘 만지고 싶었지만 이제야 만질 수 있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이 사랑의 박물관에서 그림은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와 리얼리즘이 마구 섞이게 되고, 음악은 해저문 선술집의 뽕작부터 김광석의 웃던 그녀로부터 베토벤의 엘리자까지 가득하게 됩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손을 움직이고 눈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 색깔을 만들어 냅니다. 어느 날은 붉은 색으로, 어느 날은 푸른색으로, 어느 날은 짙은 보라색으로 사랑의 색깔을 그 사람의 마음에서 찾아내고, 내 마음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 그림에는 매일의 기대와 상상이 선을 그리고, 불타는 열정이 색을 칠하게 됩니다. 사랑은 그림도 되고 음악도 되고 춤도 되고 시도 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창작이며, 두 사람의 창조입니다. 따라서 호모 루벤스는 곧 호모 에로스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바람을 훔쳐서 내 몸안에 뼈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사랑은 투명하고 일순간이며 지나치는 감정들의 총합이지만, 그 만큼 날카롭고 실체적이며 비극적이고 희극적이고 인상적입니다. 사랑은 단단한 물질이기도 하고 우리를 감싸는 공기처럼 흐릅니다. 사랑은 고정되지 않으며 그대와의 맞잡은 손에서, 그대와의 동작에서, 그대와의 이야기에서 흐릅니다. 그 흐름속에서 우리는 가슴으로 울기도 하고 깨끗해지는 마음을 느끼기도 하고, 잔금같은 질투에 껄끄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질투가 힘일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by 다이몬 | 2009/09/26 08:53 | 트랙백 | 덧글(2)

점입가경- 꿀벅지?

이오공감이 참 점입가경이다. 꿀벅지 논쟁이 뭔지 관심 없다. 오히려 이러한 논쟁이 벌어지는 배경에 관심이 있다. 분명, 우리 사회의 파시즘이나 마초이즘의 문제와 '꿀벅지'라는 분명한 성희롱 단어의 사회적 문맥에 대해서는 논의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이건 아니다 싶다. 도대체 이 논쟁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결론이 무엇인가? 저자거리에서 얻어 줏은 단어를 팔려고 찌라시들이 서둘러 다룬 적이 한 두 번이었는가? 문제는 오히려 이 논쟁에 소모되는 우리의 정신세계에 있다.

최근들어 이글루를 비롯한 몇몇 블로그 공간에서 발생하는 논쟁들은 노무현과 김대중 서거 이후로 이슈를 잃고 펌질과 패거리 싸움과 논쟁의 의의가 전혀 없는 몇몇 흥미거리에 치중되어 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몇몇 정말로 중요한 이슈들을 놓치거나 잊고 있다. 한예종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와 지금 정권의 잘못된 반 민주적 정책에 대한 비판은 아직 끝나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고 미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라고 까지 볼 수 없는, 논쟁의 의의가 뭔지도 모를 말싸움으로 가고 있다.

도대체 꿀벅지라는 것을 두고 진영들이 갈려서 싸워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찌라시의 짜라시질은 넘어갈만 하다. 2PM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연예인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네티즌의 잘못으로 기인했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두고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재범이라는 사람과 그의 연예계 은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용산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엠비 정권의 반민주적 정책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상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도 그 의도가 어디까지인지에서 멈춰야 한다. 꿀벅지를 웅웅대며 성적 정열을 낭비하거나, 마초들의 비이성적인 행위들에 미끼나 던지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 비판을 받는다고 바뀔 그들도 아니고, 어차피 넷상의 그들은 떡밥이나 물고 다니는 쏘가리들이다.

누구나 어떤 이슈라도 들고 나올 자유가 있다. 누구라도 그 이슈를 공론화하고 확대할 자유도 있다. 인터넷 언론의 생명은 실시간성과 집단성에 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정말 막나간다고 보인다. 이제 답도 의미도 없는 논쟁은 그만둬야 할 지점이다.

by 다이몬 | 2009/09/24 04:18 | 트랙백 | 덧글(2)

사랑1

작은 문구들로 가득한
거리에 서면
그 많은 숨겨진 느낌표들
곳곳에
그대가 보입니다.

 

작은 아이들과
속삭이는 마음들과
새싹들의 졸린 듯 올곧음을 보게 될때
나는 그대의
건강한 미소를 떠올립니다.

 

바람이 쇠소리를 내고
시대가 비명을 지를 때도
그대의 따뜻한 인사를 떠올릴때
난 그대 마음의 풍경이 됩니다.

 

그 눈 안에 세계가 숨어 있고
그 손 안에 무한의 그림이 있고
그 발 안에 강건한 상승이 있으니
그대는 분명 내 사랑입니다.

by 다이몬 | 2009/09/23 23:38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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