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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발전에 대해서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

프랑스의 지성사에 있어서 불연속론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바슐라르로 대표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자(물론, 시학과 현상학자로도 유명하며, 깡뀔렘, 푸코등의 유명한 20세기 프랑스 지성들의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들은 인간 인식의 철학적 발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일종의 도약(leap)이 존재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포스트 근대 막시스트를 통해 정치적 입장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만일 인류의 보편사가 일률적인 변화가 아닌 급격한 혁명등을 통해 발전했다면, 그리고 그러한 발전이 기술과 과학의 예측불가능한 도약을 통해 발전했다면, 우리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연속적 진보라는 근대 자유주의자들과 시장경제 옹호자들의 입장과 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등을 비롯한 동서양의 혁명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르네상스라는 시기가 이룩한 것은 이전 체계의 붕괴라기 보다도, 인식의 불연속적 발전을 보여준 것이며, 근대와 양차대전의 진행,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포스트 모던사회의 출현 역시 이러한 급속한 불연속적 역사 발전과 관련이 되게 된다.

과학에서의 불연속설은 쿤의 paradigm shift라는 용어를 통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인류의 지성사는 단순한 진보가 아닌 혁명적인 불연속적 도약을 걸쳐서 일어났다는 이러한 논의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도 그 중심에 서게 된다. 푸코의 역사관 혹은 지성사는 epistme의 불연속적 도약으로 읽힐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측면이다.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서양) 역사는 analogy의 시대에서 modernity의 시대로 에피스테메의 불연속적이고 급속한 변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 예로서, 분류학이나 언어학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이전에 없던 학문으로서의 분류학은 지구상의 존재들에 대한 과학적 분류를 시작했으며, 언어학 역시 음성학이나 비교언어학등이 taxanomy 즉 분류학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푸코의 불연속론은 역사를 고고학자의 눈으로 볼 수 있음을 암시하게 되었으며, knowledge is power가 단순히 지식이 힘이라는 것이 아닌 어떠 지식도 이미 권력과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권력의 전반적인 도약과 함께 지식의 도약, 혹은 인식의 도약이 있음을 입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푸코의 지식론은 포스트 막시즘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역사의 전반적인 진보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맋시스트들은 역사가 불연속적이며, 혁명은 급격한 역사의 불연속적 도약을 이룩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적 혁명론에도 이론이 생기게 된다. 만일 역사가 불연속적인 혁명을 통해 발전한다면, 왜 그 진정한 혁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느냐는 점이였으며, 왜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가 그 혁명의 궁극적 목적성을 보이지 않았느냐는 점이 문제가 된다.

바로 이점에서 또다른 포스트 맋시스트들은  teleology적인 즉 목적론적인 발전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벤야민을 비롯한 새로운 맋스주의자들은 혁명은 소규모로 일상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러한 작은 혁명들이 결국 거대한 역사적 도약을 부르게 될 것이라 보게 된다. 더구나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혁명은 늘 yet-to-come의 상태, 즉 늘 always already 이미 존재하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이룩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서 읽혀지게 된다.

결국 역사의 비연속적인 발전에 대한 논의는 역사와 진보라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로 바뀌게 되며, 진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혀 맋시스트답지 않은 맋시즘이 출연하게 된다. 오히려 그들은 각각의 전지들에서의 작은 혁명들을 이룩하려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소수자의 연합, 소수자 운동, 새로운 꼬뮨주의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역사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진보에 대한 믿음을 근대의 소산이라고 보고, 근대라는 것 자체 역시 권력(니체와 푸코의 개념에서)의 산물이며, 인간이라는 신화에 기대여 있다고 보게 된다.

푸코는 그의 order of things에서 근대에 갑자기 등장한 인간의 얼굴은 이제 해변가의 모래위에서 너무 늙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 물결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예언 아닌 예언을 하였다. 근대는 쓸쓸히 퇴장할 것이며, 인간에 대한 웃기지도 않은 믿음과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 역시 포스트근대의 아노미속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이였다.

개인적으로 그의 의견에 완전히는 동의할 수 없으나, 어느 정도는 그러한 일들이 진행된다고 본다. 기술문명의 빛의 속도로의 발전, 근대의 산물인 민족과 국가를 총체적 아노미로 빠뜨리는 전지구적 이동들과 자본의 흐름, 끝없이 발생하는 소수자들과 그 소수자들의 극렬한 저항.. 역사는 근대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진보는 아니다. 오히려 근대를 해체하는 반동의 세계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속에서 지금도 발견되는 작은 혁명들을 보고, 꿈꾸게 된다. 노무현 탄핵 반대 시위, 태안반도 봉사활동, 삼성에 대한 수사등은 우리 삶에서의 작은 혁명들이 왜 중요한 지를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지지부진한 정체를 원하는 보수는 현상을 전혀 잘못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면적 불연속이 아닌 다층적 불연속으로 움직이는 리좀의 세계인 역사와 사회속에서 그들은 지금 바로 당신의 옆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혁명들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종말을 고했으나, 혁명은 더 작게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

by 다이몬 | 2008/03/01 14:47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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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두비 at 2008/03/09 18:20
잘 읽었습니다.
'우리 삶에서의 작은 혁명들'.....인상적인 표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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