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6일
진중권의 그 참을 수 없는 "싹아지 없음(?)"에 대하여
논쟁이 아주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다. 디워에 대한 미국 시장에서의 개봉은 이미 그 결과가 보이는 듯 하다. 입성은 했으나 수성은 못했다. 간판은 걸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2차시장 운운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디워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더러, A급을 표방하는 영화가 B급시장을 노리고 DVD에서의 판매수익을 기다리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국내에서 벌은 돈으로 버티기에는 심형래 사장도 꽤 힘이 들 것이라 예상된다. 디워가 어떤 결과를 냈는지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 아니, 사실상 이렇게 문제가 심각하게 번져가는 형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이 문제가 진중권이 말하고 싶은 바 대로, 지금의 한국인들의 어떠한 '집단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다. 그것이 애국심이라는 집단성이라고만 보기에는 더욱 큰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
흔히들 사실명제와 가치명제는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판단에 있어서도 가치판단과 사실판단, 미적판단은 서로 다른 분야를 차지한다고 본다. 사실이 과학적인 영역이라고 한다면, 미적 판단은 주관적이고, 가치판단은 실천적이다. 칸트적인 이러한 구분은 벌써 서구사상의 근간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서로 다른 것일까? 미적 판단과 가치판단이 다른 것일까? 사실 문제는 쉽지 않다. 우리의 미적판단이 가치판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즉 누구나 그 작품을 보면 좋다고 말해야 미적 판단이 개별적 가치판단을 넘어서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점에서 미적 판단은 보편적이라는 모순적 주장을 내놓았다. 사실 그로서는 이러한 주장이 마지노선이였을 것이다. 만일 미적 판단이 모두 개별적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아름다움'에 동의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모나리자가 동네 순자의 그림만큼의 가치를 공유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취향이라는 단어는 문제적인 단어이다. 흄등이 주장하듯 만일 취향이 개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보편적 공감대에 대한 문제를 제외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적 판단 역시 보편적 가치와 개별적 가치라는 윤리,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게 된다. 더구나, 최근에 들어서 예술은 사회적인 현상이자 문화적인 현상이 되면서, 보편적 가치보다는 개별적 가치와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의 가치의 문제로 많이 부각되게 되었다. 즉 이제 예술의 문제는 문화전쟁속의 가치의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오면서, 예술은 전혀 의도하지 않던 당파적인 문제에 휘둘리게 되었으며, 정치와 도덕의 문제로까지 얽히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진보진영의 예술과 보수진영의 예술을 가르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예술에 대해 박수를 보내게 되었다. 하다 못해 장애인영화는 늘 장애인의 자립과 인간됨이라는 가치에 충실해지게 되었다. 한 때 장정일이 반대하던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가치화"되었고 "보편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자본주의와 대중이라는 새로운 예술향유계층과 물적 토대가 존재하게 된다. 과거에 분명히 계급적으로 나뉘던 예술의 향유가 이제는 다소 복잡한 양태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양반이 누리는 문화와 기층계급이 누리는 문화가 완전히 구분이 되었고, 서로에 대한 억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계층과 상관없이 누구나 한 영화에 대해 호오를 주장하며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서 계급성이나 각종 기존의 가치의 문제들이 같이 간다는 점이다. 우리의 전통적 계급성과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소외현상은 무리한 대립을 부르게 되었다. 미적 평가를 계급적 잣대로 나누면서, 우리는 어떤 평론가의 말을 "고귀한 이들의 씨부림"으로 듣게 되었고, 그러한 고귀한 이들의 "악다구니와 같은 싹아지 없음"에 분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귀한 계층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평민성을 주장하는 어떤 문화 인사에 대해 "계층적 전투의식"을 느끼고 있다. (일부 진보인사들의 문화행보는 이런 점에서 당파적이며, 자기보전적이다.) 김규향의 태도는 바로 이러했다. 더구나, 이들은 자신의 이러한 뿌리 깊은 계층적 반항의식을 보다 유연한 문화영역까지 투사시키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진중권이 싹아지 없어지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 가면을 벗으라는 것이다. 실제적인 계급의 문제나 문화의 문제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어떠한 자신들의 리상트망이 집결될 수 있는 부분에 모여들어, 가치의 헤게모니를 쥐겠다는 태도는 문화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현상을 노빠들의 행태와 비교하는데,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하나의 가치를 위해 모인다는 것은 유사하지만, 그 대상이 실천적 영역인 정치인 것과 실천성과는 다른 영역이 판단이 작용하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더구나, 다른 문화 매체와 영화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 영화는 분명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산업적 매체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요소-투자, 생산, 소비-그리고 홍보와 판매, 그리고 그를 통한 재투자의 매커니즘 뿐 아니라, 질과 양이 배리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예술적으로 적당히 타협한 작품들은 승리하게 된다. 즉, 영화는 원래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점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장르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가치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어떤 측면에서, 전태일에 대한 영화 역시 전태일의 삶과는 배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진중권이 비판하는 몇몇 너무나 올곳은 정신의 평론가들과, 이러한 문화적 내막은 무시한채 충동적으로 내달리는 네티즌들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심형래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건 순전히 자본의 힘이다. 즉, 그의 영화는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극장에 나오는 소외받은 한 사람의 성공스토리가 아니다. 영화 이전에도 그는 충분히 성공한 연예인이였고, 누구보다 많은 투자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끝까지 자신의 underdog정신, 다시 말해 피해자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홍보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중심에는 늘 소외받음을 느끼는 대한민국 대중들의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진중권은 성급했고, 싹아지가 없었고, 너무 나댔다. 그 역시 이번 현상을 지나치게 몰고나가서 스스로를 홍보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은 소외를 느끼고 겪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리상뜨망(니체적 노예의식과는 다른)은 꽤 많은 네티즌들을 하나의 이슈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의 영역이 아닌 문화의 영역에 대해 잘못된 판단기준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을 생산해낸 현재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 초기 진중권의 비판은 이러한 점에서 옳았다. 감상주의, 애국주의, 집단주의, 패배주의는 위험한 파시즘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협은 영화하나에 대한 평가로서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며, 좀 더 진중한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대중독재라는 좌파를 가장한 우파적 논리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파시즘의 생산양식에 대한 사유가 복잡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심형래 영화와 그 우매한 몇몇 인사들의 행태들이 파시즘의 양상을 분명 보인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심정주의에 아무리 연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대상에 대한 비난은 결국 사태의 핵심을 흐리게 된다.
더구나, 진중권 역시 그 '싹이지 없음'이 너무 전략적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너무 특정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만 그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아무리 가치판단보다는 예술적 판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자본주의적 성격이 이미 그 예술적 판단을 무의미하게 만들곤 한다. 심형래 영화는 진중권이 분석할 "예술작품"이 아니다. 가장 자본화되고 할리우드 짝퉁이 되려는 "상품"이다.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분명히 그점을 직시하고 있다. 심형래의 영화는 과거 짝퉁 혼다를 만들어서 미국시장을 두두리던 현대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대국에 가면 뭔가 대단한 것처럼 치장되는 치졸한 상업적 아이템에 불구하다. 그런 상업적 아이템에 미학적 잣대로 흥분하는 건 가치판단이 미적 판단을 완전히 앞선 것이다. 결국 말이 거칠어질수록 진중권은 디빠들의 말도 안되는 가치판단과 같은 방향을 가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 영화를 보지 말고, 그 영화를 만들어낸 시스템과 우리의 분노의 근거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 심형래는 그런 점에서 논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진중권의 문제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싹아지 없음은 비평가로서의 좋은 자세라는 점이다. 그것이 싫다면, 읽지 않으면 된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이나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 싹아지 없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취향이다.
흔히들 사실명제와 가치명제는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판단에 있어서도 가치판단과 사실판단, 미적판단은 서로 다른 분야를 차지한다고 본다. 사실이 과학적인 영역이라고 한다면, 미적 판단은 주관적이고, 가치판단은 실천적이다. 칸트적인 이러한 구분은 벌써 서구사상의 근간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서로 다른 것일까? 미적 판단과 가치판단이 다른 것일까? 사실 문제는 쉽지 않다. 우리의 미적판단이 가치판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즉 누구나 그 작품을 보면 좋다고 말해야 미적 판단이 개별적 가치판단을 넘어서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점에서 미적 판단은 보편적이라는 모순적 주장을 내놓았다. 사실 그로서는 이러한 주장이 마지노선이였을 것이다. 만일 미적 판단이 모두 개별적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아름다움'에 동의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모나리자가 동네 순자의 그림만큼의 가치를 공유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취향이라는 단어는 문제적인 단어이다. 흄등이 주장하듯 만일 취향이 개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보편적 공감대에 대한 문제를 제외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적 판단 역시 보편적 가치와 개별적 가치라는 윤리,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게 된다. 더구나, 최근에 들어서 예술은 사회적인 현상이자 문화적인 현상이 되면서, 보편적 가치보다는 개별적 가치와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의 가치의 문제로 많이 부각되게 되었다. 즉 이제 예술의 문제는 문화전쟁속의 가치의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오면서, 예술은 전혀 의도하지 않던 당파적인 문제에 휘둘리게 되었으며, 정치와 도덕의 문제로까지 얽히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진보진영의 예술과 보수진영의 예술을 가르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예술에 대해 박수를 보내게 되었다. 하다 못해 장애인영화는 늘 장애인의 자립과 인간됨이라는 가치에 충실해지게 되었다. 한 때 장정일이 반대하던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가치화"되었고 "보편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자본주의와 대중이라는 새로운 예술향유계층과 물적 토대가 존재하게 된다. 과거에 분명히 계급적으로 나뉘던 예술의 향유가 이제는 다소 복잡한 양태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양반이 누리는 문화와 기층계급이 누리는 문화가 완전히 구분이 되었고, 서로에 대한 억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계층과 상관없이 누구나 한 영화에 대해 호오를 주장하며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서 계급성이나 각종 기존의 가치의 문제들이 같이 간다는 점이다. 우리의 전통적 계급성과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소외현상은 무리한 대립을 부르게 되었다. 미적 평가를 계급적 잣대로 나누면서, 우리는 어떤 평론가의 말을 "고귀한 이들의 씨부림"으로 듣게 되었고, 그러한 고귀한 이들의 "악다구니와 같은 싹아지 없음"에 분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귀한 계층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평민성을 주장하는 어떤 문화 인사에 대해 "계층적 전투의식"을 느끼고 있다. (일부 진보인사들의 문화행보는 이런 점에서 당파적이며, 자기보전적이다.) 김규향의 태도는 바로 이러했다. 더구나, 이들은 자신의 이러한 뿌리 깊은 계층적 반항의식을 보다 유연한 문화영역까지 투사시키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진중권이 싹아지 없어지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 가면을 벗으라는 것이다. 실제적인 계급의 문제나 문화의 문제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어떠한 자신들의 리상트망이 집결될 수 있는 부분에 모여들어, 가치의 헤게모니를 쥐겠다는 태도는 문화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현상을 노빠들의 행태와 비교하는데,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하나의 가치를 위해 모인다는 것은 유사하지만, 그 대상이 실천적 영역인 정치인 것과 실천성과는 다른 영역이 판단이 작용하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더구나, 다른 문화 매체와 영화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 영화는 분명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산업적 매체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요소-투자, 생산, 소비-그리고 홍보와 판매, 그리고 그를 통한 재투자의 매커니즘 뿐 아니라, 질과 양이 배리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예술적으로 적당히 타협한 작품들은 승리하게 된다. 즉, 영화는 원래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점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장르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가치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어떤 측면에서, 전태일에 대한 영화 역시 전태일의 삶과는 배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진중권이 비판하는 몇몇 너무나 올곳은 정신의 평론가들과, 이러한 문화적 내막은 무시한채 충동적으로 내달리는 네티즌들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심형래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건 순전히 자본의 힘이다. 즉, 그의 영화는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극장에 나오는 소외받은 한 사람의 성공스토리가 아니다. 영화 이전에도 그는 충분히 성공한 연예인이였고, 누구보다 많은 투자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끝까지 자신의 underdog정신, 다시 말해 피해자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홍보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중심에는 늘 소외받음을 느끼는 대한민국 대중들의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진중권은 성급했고, 싹아지가 없었고, 너무 나댔다. 그 역시 이번 현상을 지나치게 몰고나가서 스스로를 홍보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은 소외를 느끼고 겪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리상뜨망(니체적 노예의식과는 다른)은 꽤 많은 네티즌들을 하나의 이슈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의 영역이 아닌 문화의 영역에 대해 잘못된 판단기준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을 생산해낸 현재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 초기 진중권의 비판은 이러한 점에서 옳았다. 감상주의, 애국주의, 집단주의, 패배주의는 위험한 파시즘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협은 영화하나에 대한 평가로서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며, 좀 더 진중한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대중독재라는 좌파를 가장한 우파적 논리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파시즘의 생산양식에 대한 사유가 복잡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심형래 영화와 그 우매한 몇몇 인사들의 행태들이 파시즘의 양상을 분명 보인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심정주의에 아무리 연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대상에 대한 비난은 결국 사태의 핵심을 흐리게 된다.
더구나, 진중권 역시 그 '싹이지 없음'이 너무 전략적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너무 특정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만 그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아무리 가치판단보다는 예술적 판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자본주의적 성격이 이미 그 예술적 판단을 무의미하게 만들곤 한다. 심형래 영화는 진중권이 분석할 "예술작품"이 아니다. 가장 자본화되고 할리우드 짝퉁이 되려는 "상품"이다.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분명히 그점을 직시하고 있다. 심형래의 영화는 과거 짝퉁 혼다를 만들어서 미국시장을 두두리던 현대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대국에 가면 뭔가 대단한 것처럼 치장되는 치졸한 상업적 아이템에 불구하다. 그런 상업적 아이템에 미학적 잣대로 흥분하는 건 가치판단이 미적 판단을 완전히 앞선 것이다. 결국 말이 거칠어질수록 진중권은 디빠들의 말도 안되는 가치판단과 같은 방향을 가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 영화를 보지 말고, 그 영화를 만들어낸 시스템과 우리의 분노의 근거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 심형래는 그런 점에서 논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진중권의 문제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싹아지 없음은 비평가로서의 좋은 자세라는 점이다. 그것이 싫다면, 읽지 않으면 된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이나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 싹아지 없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취향이다.
# by | 2007/10/16 09:29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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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디워혹평 진중권..제발 좀 상대해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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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진중권 비평을 보면 꼭지도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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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상업적 아이템인 동시에 문화예술 컨텐츠인 이상, 최소한의 미적 완성도는 갖추고 있어야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사실 진중권이 비판하는 지점은 디워의 미학적 성과가 아니라 디워를 광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의 행태였기 때문에 그 점은 큰 의미는 없겠습니다만.
선민의식을 컨셉으로 삼는 건지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