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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돌봄과 보살핌

세상의 근원에는 사람들의 세상이 있으며, 사람들의 세상은 마음의 돌봄에 있다. Sorgen은 하이데거의 용어중에서 가장 애매한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로는 care이라고 번역이 된다. 그러나 영어번역은 오해와 이해를 동시에 도와준다. 하이데거의 돌봄은 현상학의 지향성에 대한 그만의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관심을 지니고 지향을 하며 그 현상들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 차원의 마음의 문제는 상당히 육적인 것이다.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며 마찬가지로 그 사물에 손을 내밀고 그 사물을 잡고 도구로 사용하거나 사랑을 한다.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우리는 마음으로 다가선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돌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돌봄이 우리말의 의미처럼 애뜻한 정서를 가지지는 못한다. 다만, 다가서고 그 사물과 현상학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어로의 돌봄이라는 해석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현상을 더욱 잘 설명한다. 우리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지향성은 오히려 돌봄이라는 윤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돌봐야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반대는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에 돌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을 돌볼 마음의 준비와 비도구적인 타인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기에 이해라는 장을 열 수가 있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람을 걱정하고 갈등을 느끼면서도 그 사람의 존재를 내 마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손내밈과 돌봄과 그 마음씀에서 발생한다. 사랑은 육체에서 출발해서 현상으로 나타나고 존재의 근원을 보여준다. 두 팔이 없어도 사랑하는 이를 안으려는 돌봄의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그 가능성에 가장 큰 인간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순간 순간의 돌봄들에 우리는 왜 인간이 특별한 현존재들일 수 있는지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돌봄의 인간이 되려 한다.

by 다이몬 | 2009/11/21 19:11 | 트랙백 | 덧글(0)

생일

생일이 지났습니다. 어제였군요. 아침에 여자친구가 끓여준 미역국과 그녀가 밤에 사가지고 온 아이스크림케잌을 먹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생일날들 중의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생활 속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녀가 선물로 직접 그려 준 우리의 그림을 들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하루의 흐름이 이토록 행복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사랑해! D


by 다이몬 | 2009/11/19 18:50 | 트랙백 | 덧글(2)

아니면 말고

정연주 사장의 해임이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YTN 노조에 대한 해고의 불법성도 밝혀졌다. 노무현 정권을 통해 그들이 배운 것은 하나였다. 방송과 언론을 장악해야 정권이 편하다는 인식이였다. 특히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족벌 언론들에 대한 애정공세는 이번 미디어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친정부적 판결에서도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입도 씻도 눈도 씻도 듣도 보도 못하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면 말고라는 식이다. 죽을 때까지 때리고 나서 때린 것에 대한 후회도 한마디 없이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다. 무슨 쌍8년도식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식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야간집시금지가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조에 대한 탄압과 용산에서의 진압이 불법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흔드는 그들로서 이번 정권에서 그들의 권력이 끝나는 것은 용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불법을 일부르 저지른다면 우리 사회에 정의란 없다. 그저 힘의 논리로만 움직인다고 인정해야 한다. 법이 법의 구실을 못하고 국회의 다수가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돈없고 빽 없는 놈들 두들겨 패 놓고 아니면 말고 라고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논할 필요가 없다.

최근 유엔에 간 대한민국의 대표단들이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용산문제와 각종 시위에 대한 과잉진압과 불법 행위들과 언론에 대한 탄압에 대해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소귀에 경읽기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이딴 소리들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침묵의 외침은 절대로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촛불의 힘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을 인권 후진국으로 만들고 국제적으로 망신살 뻗치게 한 그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발악을 하는 것이다. 시대가 너무 어둡다. 어두운 시대에 검은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들이 넘실대는 것을 보는 것은 오직 나뿐일까?

이 겨울 4대강 사업으로 깍인 복지예산에 굶고 있을 이웃들과 탄압과 억압속에서 살고 있을 그들과 그 안에 속한 나를 생각해 본다. 이 겨울은 춥다. 그러나 촛불의 따스함은 아직 나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미래를 비춰준다.

by 다이몬 | 2009/11/14 02:54 | 트랙백 | 덧글(0)

그녀와의 시간들

행복한 시간들이다. 인생에서 누구와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장기간 이어진 것은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다. 일상의 대부분을 같이 지내며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던 나만의 공부와 나만의 세계를 그녀와는 소통하게 된다.

사랑은 소통의 가장 애매하면서도 가장 행복한 형태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소통할 수 있는 순간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바람이 불듯 그녀의 말과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생각이 나에게 늘 다가오고 나의 삶을 시원하게 해준다. 벅차다. 그녀의 눈과 미소와 조용한 목소리에 나의 시간들은 꽃이 되고 산들바람이 된다.

시간이 향기롭다.

by 다이몬 | 2009/11/11 10:25 | 트랙백 | 덧글(2)

왜 친일이 문제인가

레비나스를 비롯한 근대, 혹은 탈근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전기로 본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의 불가함을 논했고, 레비나스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럽에 더 이상의 전통적 윤리의 불가함을 논했다.

대한민국에서 박정희와 친일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이유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는 식민과 친일, 군사 쿠테타와 독재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장본인이자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철학과 그 이전의 사유가 그가 집권하고 육신이 환락 가운데에서 사라졌던 그 사건 (event) 이후의 철학과 사유와 같을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박정희는 세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 성공한 쿠테타는 정당한가라는 문제와 친일이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와 죽은 독재자가 어떻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가라는 점에서 이다. 이 세가지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분명히 관계가 되어 있고, 우익들의 절규와도 관련이 있다. 친일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류들에 대한 저항이며, 쿠테타를 부정하는 것 역시 대한민국의 과거 지배세력들에 대한 부정이고, 독재자를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과거의 비민주적 통치에 대한 부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정희는 죽을 수 없는 상징이며, 죽을 수 없는 담론이다. 그의 친일이 용인되고 숭고하게 여겨진다면, 우리는 일제시대를 대한제국과 근대의 발생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극우 세력들이 주장하는 일제시대의 근대화에 대한 논의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무지몽매한 조선민중을 식민시대를 통해 계몽시킨 자랑스러운 천황폐하께 감사기도를 올려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만일 그의 쿠테타가 성공한 것이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이후의 모든 성공한 쿠테타 역시 인정해 줘야 한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별이 용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공한 쿠테타는 그들의 꿈이고 그들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 극우 세력들은 나약하다. 그들은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 그들이 유일하게 기댈만 한 혁명의 방법은 군사정권과 같은 무시무시한 방법 뿐이다. 노무현 탄핵과 복귀 당시에 쿠테타를 운운하던 그들의 논리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제2의 제3의 박정희를 기대하고 다시 만들려 한다. 그 역사의 순환을 기대하기에 그들은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성공한 쿠테타여야 한다.

세째로, 결국 문제는 대한민국의 주류와 지배세력이 누구였는가와 관련이 된다. 영남에 편파적이었던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이념 지형을 지역의 분열로 만들었고, 세대간의 대립의 틀을 만들었다. 박정희시대를 살고 박정희에게 세뇌당한 세대들은 박정희라는 이름에 담긴 그들의 근대화에 대한 로망과 담론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 근대화의 영웅들은 박정희의 신격화가 그들의 인생의 가장 활동적이던 그 시대와 상통된다고 본다. 적어도 그들에게 무수한 대한민국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베트남 파병과 전통적 커뮤니티의 파괴와 근대화의 각종 부작용을 부른 박정희식 계획 경제 발전이 그들의 시대를 물화시키며 신화화시키기 때문이다. 엠비가 끝없이 자신의 과거 근대화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결국 박정희는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 시대의 상징이며, 그의 시대를 살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가 모두 그를 잊게 되는 순간까지 절대로 논의가 끊이지 않을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대한민국의 가장 암울했던 시절, 혹은 그들에게 가장 찬란했던 시대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극우 세력들이 박정희를 부정하는 이들을 아비를 팔아먹고 과거를 부정하는 호로새끼들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와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차차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과 같은 신화를 공조하는 우파청년들로 인해 논쟁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박정희와 더불어 자신들의 삶을 보상받으려는 세대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도 하나의 역사의 흐름일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이 노무현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말이다.

by 다이몬 | 2009/11/09 06:32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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