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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폭소 대한민국 - 사법부의 웃음유발자들

아무리 봐도 소도 웃고 개도 웃고 말도 웃고 지나가는 심봉사가 웃다가 눈뜰 일이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법관들이라는 양반들이 내린 결론이 절차는 위법이나 제정되면 니들 맘이란다. 그럼 무엇하러 토론을 하고 입법기관을 거치나? 그저 다수당이 내린 결론이 바로 법으로 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당신들이 주장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준법정신이라면 말이다.

조삼모사도 이보다는 유치하지 못하다. 구타유발자보다 더 저열한 웃음유발자들이 모인 저 사법부에 누가 신뢰를 보내겠는가? 경국대전을 들먹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하는 짓이 함무라비 법전까지 올라가려고 그러나? 차라리 위법을 저질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태형을 내린다고 하시지 그러나?

대한민국이 웃음 천지이다. 지금 이러한 저질유머가 신종플루보다 무섭게 퍼지고 있다. 죽은 이들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가해자라고 징역을 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7명의 죽음은 개죽음이고 1명의 죽음은 국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하고 있다. 매일 경제경제하던 대통령은 주가가 떨어져도 또 경제경제 하신다.

나라빛은 늘어나도 나라살림이 잘된다고 하질 않나, 4대강 다 죽이는 법을 들고 국가발전을 한다는 박정희시대에도 안 써먹던 유머를 하지 안나, 선거법위반 의원에게 의원적 상실인 100만원 보다 쬐끔 모자라게 벌금을 때리지 않나, 그들의 핍밥속에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들을 깔아뭉개지 않나, 하는 짓이 걸주의 시대에도 없던 행위들이다.

웃다가 코가 삐뚫어지고 머리가 멍해질 정도이다. 이딴 사법부 있어서 뭐하려고 그러나? 가진자들과 정권의 편에만 서려고 하는 사법부에게 구역질을 느끼는 것이 비단 나만일까? 정의라는 것을 권력의 편이라고 보는 것이 그들의 사고일지인데, 우리는 도대체 어떤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법을 운용하는 이들이 그 법을 곡해하고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도대체 법안에서의 투쟁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유전무죄의 법칙이 법의 제1 해석의 틀이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헌재 재판관들이여! 역사를 두려워해라. 너희들에게 역사의 매서운 평가는 그대들의 행위에 분명히 답을 해 줄 것이다. 정의를 웃음유발 바이러스로 변환시키는 그대들에게 이 시대의 웃음이 다음 시대의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제발, 더 이상 웃기지 마라. 사람죽겄다.

by 다이몬 | 2009/10/30 01:27 | 트랙백 | 덧글(1)

도적질한 물건은 장물이 아니다.

헌재가 언제나 그렇듯이 경국대전에나 나올만한 판결을 내리셨다. 도둑질을 해도 도둑질한 물건은 장물이 아니란다. 절차가 위법해도 법이 통과되면 그 법은 법이란다. 이제 국회에서 투표하지 말아라. 토론도 하지 말자. 그냥 딴나라당 하고 싶은대로 하시지 그러시나. 1당 독재라도 좋다. 어차피 너희들이 생각하는 세상이 그게 편할테니까. 그냥 다수당 하고 싶은대로 다 해라. 다수가 원하면 그대로 하시면 된다. 엠비가 원하면 그대로 하시면 된다. 토론이고 나발이고 투표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그딴 거 하면 뭐하냐? 헌재의 유머는 끝날줄을 모른다. 니들의 법리가 경국대전에서 못 벗어난다면, 그렇게 해라. 나중에 역사가 너희들을 어떻게 판단할지 그건 너희들의 몫이 될 것이다. 너희들을 반드시 기억하고, 나의 아이들에게 꼭 전해줄것이다. 어떻게 그런 오욕의 역사가 이어졌는지를.

by 다이몬 | 2009/10/29 15:05 | 트랙백 | 덧글(0)

용산과 선거

노무현이 탄압없는 세상으로 간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용산의 그들은 가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죽은 이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이 정권의 현상태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선거가 있다. 이번 선거의 의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정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지율 50퍼센트를 넘었다고 좋아하는 그들에게 진실의 종을 울릴 시간이 와야 한다.

투표를 독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번 투표가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을 가벼이 넘어서려고 하는 그들에게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결과가 그리 나쁘게 돌아가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멈추지 말아야 한다. 약자가 짙밟히는 나라, 올바르지 않은 일들이 올바름의 탈을 쓰고 자행되는 나라,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고 현직 대통령이 아무런 비젼도 제시하지 못하는 나라, 그것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이 정권에서 노무현의 유령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by 다이몬 | 2009/10/28 22:20 | 트랙백 | 덧글(0)

노무현의 주소지 없는 편지

http://news.nate.com/view/20091008n00698

노무현 대통령의 미완성, 아니 완성은 되었으나 보내지 못했던 편지가 공개되었다. 편지란 소통의 도구이다. 작성한 이의 마음이 우체국과 우체부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되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낭만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그는 부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 편지들을 뒤로 남기고 피안의 세계로 갔다. 그의 죽음을 계속 왈가불가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부치지 못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외침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연차 수사가 웃기지도 않게 흐르고 있다. 애초에 참여정권의 가장 큰 스캔들로 비화시키려던 그들의 목표는 흐지부지 되었다. 어쩌면 노무현이 죽음 마당에 더 이상 이런 수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참하게 매장될 뻔했으나 참혹하게 싸우다가 극적으로 사라진 한 영웅에게 그들은 이제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한 시대는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현대의 이론적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큰 테마는 실제에 대한 문제이다. 라깡으로 대표되는 이론가들은 우리의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체계의 근원에는 실제계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언어학적 전환 이후로 모든 것을 언어와 기호로 파악하려 하던 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큰 공격은 사실 실제계에 대한 주장에서 나왔다. 실제는 사물로, 욕망하는 몸으로, 감추어진 죽음으로 존재하며, 드러나는 순간 감추어져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바로 진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원래 나타나자 마자 감추어질 운명에 처해 있다. 진리를 본 인간은 외디푸스처럼 눈이 멀게 된다. 진리는 그만큼 무섭고 기괴하고 (uncanny) 치명적이다. 포우의 잃어버린 편지에 대한 분석에서 라깡은 뒤팽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누구도 보지 못한 사물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의 욕망의 실제를 논한다. 미디어에서 연일 쏟아지는 죽음의 이미지는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실제로 죽어서 썩어가는 육체들이 있다. 이라크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다.

노무현의 시체를 본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시체는 실제를 담고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잔재물들 (정신분석적으로 흔적, 혹은 오브제 아라고 불리는)은 남아 있다. 그 잔재물들은 이념의 덮개를 쓰고 우리의 근간에서 실제와 진리의 존재를 말해준다. 노무현의 편지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의 육체라는 실제의 흔적이고 부분이다.

이명박 정권은 그 편지를 절대로 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그의 이 정권에서의 운명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노무현이나 김대중은 육체 조차도 용인될 수 없는 실제들이었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이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어떤 가치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의 담론들 속에서 이 둘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살해라고 하지 않겠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정권을 탄생하게 한 우리들의 집단 살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예정된 어떤 역설적 운명이었다.

편지들은 수신자가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 편지들, 즉 노무현의 파편들은 그가 목적으로 한 곳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장과 국장을 통해 지지율이 40퍼센트에 이르렀다는 이 정권안에서, 그리고 그 정권을 떠받들고 있는 세력들 속에서 그들의 편지는 부치지 못한 편지로 영원히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 편지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꿈과 그들의 이상은 번개라고 표현한 김대중의 촛불 민중들 속에서, 그를 탄핵과 죽음과 재생으로 이끄는 이들의 고요한 실천들 속에서 살아있다. 육체와 뜻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속의 진리와 글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이다.

by 다이몬 | 2009/10/08 05:06 | 트랙백 | 덧글(0)

사랑하라, 사유하라, 일하듯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핵심은 사유하고 회의하는 인간이다. 그 코기토를 회색빛 뇌피질의 세계로 규명한 것이 현대 과학이고, 그 코기토의 근원을 성기로 보게 한 것이 프로이트의 혁명이었다. 사유보다 행동을 설파한 이가 맋스였고, 사유의 정신사적 전망을 제시하려 한 것이 헤겔이었다. 니체는 인간을 넘어가야 할 다리라고 보았다. 이 모든 근대의 아버지들은 죽음보다 무시무시한 시대를 예시했고, 2차대전은 그러한 물질과 정신의 극단적 파괴를 증명해 냈다. 적어도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이후의 철학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를 관통하는 또하나의 조류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적어도 프랑스혁명의 줄기를 따라 생성된 68혁명과 그 시대의 시대적 조류는 (히피즘이나 정신분석학) 우리에게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사랑이 가진 의미를 되세기게 만들었다. 메를로-뽕띠의 말대로 우리의 육체는 보이는 것들의 세계속에 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사유를 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지니게 되었다. 사랑은 사유와 감각의 중간 지점에 있다. 사랑은 육체에서 파동을 일으키고 정신에서 개념으로 구체화 된다.

낭만주의와 근대의 시인들은 모두 사랑을 개별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시인들은 사랑의 무게를 이야기 한다. 나의 너에 대한 사랑은 사실 나와 너의 사건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혁명의 작은 뿌리들이고 형성해갈 이야기들의 한 실타래이다. 한 개인의 사랑이 인륜의 시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한 개인의 사랑이 얼마나 사회적이며 역사적이며 문화적인가를 이제 우리는 이야기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설파하듯 에로스와 아나케 (필연성)는 상충되면서도 같이 가게 된다. 인간의 사랑은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 일하고 생활하고 활동하는 인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낭만적 사랑은 사실 도시 속의 한 행위들일 수 있으며, 우리에게 사랑은 일과 여가의 과정중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랑은 순수하게 육체적인 휴식과 일의 세계에 속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정은 늘 사유하는 자신과 감각하는 자신과 일하는 자신 속에서 형성되고 이루어진다. 섹스 앤 시티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주인공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일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후기 근대가 낳은 인류학적 지평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나케와 에로스 중간의 사랑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일하고 사유하고 휴식핟록 되어 있다. 우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기계이며, 기계는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한다. 일하는 육체와 사랑은 떨어질 수 없다. 근대 이후의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은 여가와 예술적 재생산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적어도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사랑하라. 창조하듯이.

by 다이몬 | 2009/10/04 20:5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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